인권운동사랑방
 

  


2002년 07월 31일 (수)
제 2145 호
발행처 : 인권운동사랑방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기획기사> 학살현장을 가다 (4)

52년째 폐광에 방치된 3천여 유골


경북 경산시 평산2동 산중턱에 위치한 코발트 폐광. 2001년 3월 11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취재팀을 비롯한 합동 유골발굴팀은 수평갱도의 콘크 리트 외벽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뒤, 폐광의 내부로 들어갔다. 그 암흑의 공간 속에서 발견된 것은 50여 년을 진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유골 수십 여 점. 그러나 아직도 3천여 구 이상의 유골이 폐광의 수직갱도 내에 방치되 어 있다. 1950년 발생한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이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1950년 7월 하순. 경산지역 일대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일제히 군·경에 의해 소집되거나 연행되기 시 작했다. 국군특무대(일명 CIC) 혹은 경찰에 의해 지서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 고, 호출을 받은 뒤 자진해서 출두한 사람들도 있었다. 경위야 어찌됐건 일단 지서로 끌려간 사람들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운 좋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 곤….

"팔공산 쪽에서 대포 소리가 막 나던 무렵이었습니다. 군인들이 마을을 왔다 갔다했습니다. 며칠 후,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더니 광산 창고에 갇혀 있던 아 버지에게 날라다주기 시작했습니다. 한 열흘쯤 도시락을 날라줬는데, (군경들 이) 어느 날 갑자기 '밥을 안 받는다'고 하더랍니다. 음력 7월 보름이었습니 다"(유족 이정우). 공무원으로 일했던 이정우(59) 씨는 69년경 비밀취급인가 가 필요한 직책으로 옮기려는 순간,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알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신원조회 기록은 '부역 및 행방불명'이었다.


총살 후 수직갱도에 매장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인원은 3천5백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경북지 역 최대의 학살현장이다. 당시 경산지역의 보도연맹원 약 4-5백명을 비롯해 청도, 대구, 영천 등지의 보도연맹원, 그리고 대구형무소에서 인계된 사상범 들이 모두 포함된다. 각지에서 폐광산으로 이송된 사람들은 깊이 100미터가 넘는 수직갱도 입구에 8명씩 세워져 총살된 후 곧바로 수직갱도 아래로 매장 되었다. 2001년 3월 수습된 유골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 두개골에 관통상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고, 심하게 불에 탄 흔적이 발견됐다. 사망자의 연령은 15 세에서 60대까지 걸쳐 있으나, 대부분 20-30대의 청년들이라고 한다.

과연 보도연맹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그처럼 잔인하게 희생되었을까? 경산학살사건을 꾸준히 추적해온 경산향토신문의 최승호 기자는 "희생자 대 부분이 사상과는 무관한 농민들이었고, 좌익활동자는 10% 미만으로 추정된 다"고 말한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계기도 '좌익에 대한 부역 혐의'는 극소수 뿐이고, '비료를 더 준다'거나 '모내기를 도와준다'는 식의 감언에 속아넘어갔 던 것이라고 한다. 유족 이정우 씨는 "마을 구장(지금의 이장)이 주민들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적극 권유했고, 주민들의 도장을 다 보관하고 있던 구장이 마음대로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보도연맹원 대량학살은 전쟁 발발 후 계속 전선에서 밀리던 이승만 정권의 위기의식과 무관치 않다. 즉 전선 후방에 산재해 있던 보도연맹원들 이 대거 인민군에 가담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대구형무소의 사상범들을 포함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빨갱이 콤플렉스'의 망령

2000년 3월 경산유족회가 구성되면서 새로이 진상규명활동이 벌어지고 있지 만, 힘에 겨운 실정이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52년째 버려져 있는 유골부터 수습하는 일. 그러나 수억원에 달하는 발굴비용을 감안할 때, 유족들은 엄두 조차 내기 힘들다. 경산시나 경상북도 역시 예산 문제를 이유로 중앙정부에 책임을 미루고 있다. 경산향토신문의 최승호 기자는 "국회 차원의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지방자치제가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무엇보다도 50년간 내면화된 '빨갱이 콤플렉스'가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최승호 기자는 "정부나 국회의원들은 '보도연맹=좌익'이라는 시각에서 못 벗어나 있다. 지역민들도 희생자에 대한 측은지심은 있지만, '좌익'에 대한 명예회복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 기자는 "유족들이 한사코 '순수한 양민'이었음을 입증하려 애쓰는 것도 그러한 무의식의 발로"라며 "결 국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사상적 복권 없이는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좌익사상 역시 사상으로서 인정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 되어야 한다는 진단인 것이다. .

"우리는 뺄갱이 아들이라, 연좌제라, 면서기도 하나 몬 하고, 군대 가도 요직 은 몬 하능기라. 그런 식으로 입 닫고 죽을랑가 싶었는데…. 인자 마 때가 왔 다. 그래 이때까지 설움 받았는데 우리도 할말은 하자해서 유족들이 뜻을 모 아 하는데, 아직까지도 유족들이 겁을 먹어 같이 해보자 캐도 안 나오능기라. 광주, 거창, 제주는 다 됐는데, 여기는 와 안되나? 광주보다도 먼저 돼야 하 는 기 아이가? 우리는 총도 한 번 몬 쏴 보고 죽었는데…. 진상조사 해 가지 고 이제는 정부가 해결 좀 해 주이소. 정부 책임이라."(유족 태윤희(68) 씨) ==<보도연맹 사건>==

48년 국가보안법의 제정, 49년 5월 군대 내 좌익 총살조치 등 이승만 정권의 좌익탄압이 극에 달하던 49년 6월, 이 정권은 이른바 '좌익경력자'들을 강제 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킨다. 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절대지지, 북괴정권 절대반대"등의 강령을 가진 관제반공단체로서 1년 만에 전국에서 33만여명을 가입시키게 됐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 직후 약 2개월 사이, 대전·경산 등지를 비롯해 38 선 이남 전역에서 최소 20만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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